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지난 12일(현지시간) 2025회계연도 4분기 실적과 함께 AI 사업 전망을 내놓으면서 시장이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숫자만 보면 ‘AI 대호황’에 가까운 성장인데, 주가는 10% 안팎 급락했다. AI의 미래를 두고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폭발한 장면이다. 한편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 호크 탄은 “AI 수요 냉각론은 과장됐다”면서도 연간 AI 매출 전망 제시는 끝내 거부하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래에서는 브로드컴이 실적 발표와 콘퍼런스콜에서 밝힌 ‘AI의 미래’에 대한 시각을 정리하고, 투자자들이 어디에서 불안을 느끼는지까지 함께 짚어본다.
- 숫자로 드러난 브로드컴의 AI 성장 속도
브로드컴의 2025회계연도(회계연도 기준) 실적을 보면, AI가 이 회사 사업 구조를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 2025 회계연도 전체 매출: 640억 달러, 전년 대비 24% 성장
· 그 중 반도체 매출: 370억 달러
· AI 반도체 매출: 200억 달러, 전년 대비 65% 성장
· 인프라 소프트웨어(주로 VMware): 270억 달러, 26% 성장
4분기만 떼어 놓고 봐도 AI 쏠림은 뚜렷하다. 4분기 전체 매출은 180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8% 늘었고, 이 가운데 반도체 매출은 111억 달러로 35% 증가했다. 특히 AI 반도체 매출은 65억 달러 수준으로 추정되며 1년 전보다 74% 늘었다.
탄 CEO는 내년 1분기(2026 회계연도 1분기)에 AI 반도체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두 배 수준인 82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직전 분기 성장률(74%)보다 더 가파른 증가를 가정한 가이던스다.
숫자만 보면 ‘AI 피크’가 아니라 ‘AI 가속’에 가깝다. 그럼에도 시장은 주가 급락으로 응답했다. 이유는 매출이 아니라 마진과, 그 이면에 깔린 투자자 인식에 있다.
- “AI 수요 냉각은 과장” vs “연간 전망은 못 주겠다”
이번 실적 발표에서 가장 눈에 띈 대목은 AI 수요에 대한 상반된 메시지였다.
한쪽에서는 탄 CEO가 “AI 하드웨어 수요가 식고 있다”는 시장의 우려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는 최근 3개월간 예약 물량이 “과거에 본 적 없는 수준”이라고 표현하며, 고객들의 주문이 단기 트렌드가 아니라 다년간 이어질 구조적 수요라고 강조했다.
실제 브로드컴이 공개한 AI 관련 백로그(잔여 주문) 수치는 거대하다.
· XPU(커스텀 AI 가속기) 및 네트워킹을 합친 AI 관련 주문 잔고: 730억 달러 이상
· 브로드컴 전체 백로그 1,620억 달러의 거의 절반 수준
· 이 물량을 대략 18개월 안에 공급하겠다는 계획
여기에 더해, 브로드컴은 AI 스타트업 앤트로픽(Anthropic)으로부터 차세대 TPU 랙에 대해 110억 달러 규모의 추가 주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는 직전 분기에 받았던 100억 달러 주문에 이은 추가 계약으로, 단일 고객 기준으로도 이례적인 규모다.
탄 CEO는 이런 숫자를 근거로 “고객 수요 냉각론은 과장된 가설”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내놨다. 앞으로도 AI 인프라 투자가 꺾이기보다는, 새로운 고객과 더 큰 규모의 주문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는 연간 AI 매출 가이던스를 내놓아 달라는 요청을 끝까지 거부했다. AI 매출은 “움직이는 목표”라며 2026년 전체를 숫자로 찍어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단기 수요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보이면서도, 중장기 숫자는 공개하지 않는 이 모순적인 장면이 투자자들에겐 “AI는 성장하는데, 돈은 얼마나 남는지 확신이 없다”는 시그널로 읽혔다.
- 실리콘 포토닉스는 ‘언젠가’…지금은 구리와 플러그형 광학의 시대
AI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다. 초거대 언어모델(LLM)을 학습하려면 GPU나 XPU 같은 가속기 수천 장을 연결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은 결국 네트워크 속도와 지연시간에 의해 제한된다.
실적 발표 다음 날 공개된 인터뷰에서 탄 CEO는 실리콘 포토닉스(실리콘 기반 광통신) 기술에 대해 “언젠가는 필수가 되겠지만, 데이터센터에서 당장 중요한 기술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가 그린 AI 데이터센터 네트워크의 로드맵은 크게 세 단계다.
먼저 랙 내부와 랙 간을 연결하는 구리 기반 인터커넥트를 더 키우고 최적화하는 단계
그 다음은 전자와 광소자를 결합한 플러그형 광학 모듈(플러그러블 옵틱스)을 최대한 활용해 속도와 대역폭을 끌어올리는 단계
이 모든 걸로도 부족해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 실리콘 포토닉스를 본격적으로 채택하는 단계
탄 CEO는 실리콘 포토닉스 전환이 “필연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지금 주류가 될 기술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현재 브로드컴의 전략은 구리 기반 인터커넥트와 플러그형 광학 제품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실리콘 포토닉스는 그 다음을 대비해 연구개발(R&D)로 미리 준비해 두는 쪽이다.
이 메시지는 AI 인프라 투자자에게 두 가지 신호로 읽힌다. 단기적으로는 이더넷·스위치·옵틱스 같은 기존 네트워크 기술이 여전히 큰 시장임을 의미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실리콘 포토닉스를 둘러싼 경쟁이 한 번 더 큰 판을 열 수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 GPU 독식 끝? 브로드컴이 본 ‘커스텀 XPU’의 시대
탄 CEO가 그린 AI의 미래에서 또 하나 중요한 키워드는 ‘커스텀 칩’이다. 그는 이번 실적 발표에서, 브로드컴의 성장 축을 엔비디아 같은 범용 GPU가 아니라 XPU라 부르는 맞춤형 AI 가속기에서 찾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4분기 AI 반도체 매출 65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은 구글의 TPU, 이른바 아이언우드(Ironwood) 같은 커스텀 칩에서 나왔다. 구글 제미나이 모델을 학습한 TPU뿐 아니라, 앤트로픽이 사용할 차세대 TPU 랙도 브로드컴이 설계·공급하고 있다.
탄 CEO가 밝힌 커스텀 XPU 관련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 브로드컴의 커스텀 AI 가속기 사업은 1년 새 두 배 이상 성장
· 구글 외 다른 하이퍼스케일러들도 자체 칩을 선택하는 흐름이 확대
· 앤트로픽에 대한 TPU 랙 공급 계약은 100억 달러에 이어 110억 달러 추가로 이어진 상황
· 4분기에는 다섯 번째 XPU 고객이 새로 합류했으며, 주문 규모는 10억 달러 수준
탄 CEO는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커스텀 칩을 택하는 이유로 ‘가격 대비 성능(Price/Performance)’과 ‘소프트웨어 스택 단순화’를 꼽았다. 일반 GPU를 쓰면 복잡한 소프트웨어 최적화로 성능을 짜내야 하지만, 커스텀 칩에서는 자사 워크로드에 맞춰 연산을 하드웨어로 박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모든 플레이어가 끝내 커스텀 칩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GPU 역시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어, 일부 플레이어는 범용 GPU를 쓰면서 소프트웨어 경쟁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고객이 결국 다 자기 칩을 만들 것’이라는 시장의 극단적인 시나리오 역시 과장됐다고 선을 그었다.
결국 브로드컴이 그려내는 AI 인프라의 미래는, GPU 단일체제가 아닌 GPU와 XPU, 그리고 이들을 묶는 이더넷·옵틱스 네트워크가 함께 성장하는 다극 구조에 가깝다.
- 마진 압박과 ‘AI 버블’ 논란…시장과의 온도차
문제는 이런 공격적인 성장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AI가 브로드컴의 수익성에는 단기적인 부담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브로드컴은 4분기와 2026 회계연도 1분기를 설명하면서, AI 매출 비중이 늘어나면서 전체 총마진이 분기 기준 1%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밝혔다. AI 칩은 매출 규모는 크지만, 네트워킹이나 소프트웨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마진이 낮기 때문이다.
이 발언과 함께, 탄 CEO가 연간 AI 매출 전망을 “말하기 어렵다”며 피한 대목이 시장 불안을 키웠다. ‘성장은 하는데, 얼마나 이익을 남길 수 있는지는 회사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시그널로 읽힌 것이다.
실제 미국 증시에서 브로드컴 주가는 실적 발표 직후 시간외에서 10% 안팎 급락했고, 다음 날 정규장에서도 8~11% 하락을 기록하며 나스닥·S&P500을 끌어내리는 주범이 됐다. AI 관련주 전반이 동반 조정을 받으면서 ‘AI 버블’ 논란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탄 CEO의 메시지는 분명히 낙관적이다. 그는 AI 하드웨어 수요가 꺾이는 시나리오는 “과장된 가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또 앞으로 18개월 동안 730억 달러 규모의 AI 백로그를 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장은 “성장”보다 “수익성”과 “지속 가능성”에 더 예민해진 상태다. 이미 1년 동안 70% 이상 오른 주가 위에서 내려온 실적과 전망이기 때문에, 작은 실망도 멀티플 압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브로드컴의 메시지가 던지는 시사점
이번 브로드컴의 발언과 숫자를 정리하면, AI의 미래에 대한 회사의 시각은 크게 다섯 가지 키워드로 압축된다.
수요는 식지 않는다
· AI 하드웨어 수요 냉각론을 과장으로 규정
· 730억 달러 규모의 AI 백로그, 18개월 공급 계획
· 신규 XPU 고객과 대형 AI 스타트업 주문이 추가로 쌓이는 중
성장은 빠르지만, 마진은 고민
· AI 비즈니스가 전체 매출과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은 분명
· 동시에 총마진을 1%포인트 낮추는 요인도 AI
· ‘고성장·저마진’ 구조를 어떻게 풀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
데이터센터 네트워크의 진화 경로
· 단기: 구리 기반 인터커넥트와 플러그형 광학이 주역
· 중·장기: 결국 실리콘 포토닉스로 갈 수밖에 없지만, 아직은 시기상조
· 브로드컴은 현재 수익이 나는 영역에 집중하면서도 차세대 기술을 연구개발로 선제 준비
커스텀 XPU vs GPU, 다극 체제로 가는 AI 인프라
· 구글 TPU, 앤트로픽 계약 등 커스텀 칩이 성장의 핵심 축
· 모든 플레이어가 커스텀으로 갈 것이라는 극단 시나리오는 부정
· GPU와 XPU, 네트워크가 함께 성장하는 혼합 구조를 전제로 전략 수립
숫자로 말하지 않은 구간, 투자자들의 신경질
· 연간 AI 매출 가이던스를 끝까지 내놓지 않으며 신중함을 택함
· 시장은 이를 ‘AI는 크지만, 예측 가능성은 낮다’는 신호로 해석
· AI 테마 전체에 대한 의심이 커진 시점이라, 주가 변동성이 더 확대
AI 인프라 투자 경쟁은 이제 막 1라운드를 통과하는 단계다. 브로드컴이 보여준 것은, GPU 한 종목만 보고 베팅하기에는 판이 너무 커졌고, 동시에 그 판이 꼭 높은 마진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현실이다.
호크 탄이 지난 금요일 실적 발표에서 내놓은 메시지는 단순한 장밋빛 전망도, 과도한 비관론도 아니다. AI는 분명히 장기 성장 축이지만, 그 성장의 과실을 누가 얼마나 가져갈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자본과 시간이 필요할지는 여전히 ‘움직이는 목표’라는 냉정한 인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