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지 오스본이 2025년 7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헤비메탈의 아버지’이자 ‘어둠의 황제’로 불리던 그는 오랜 투병 끝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 최근까지 파킨슨병과 척추질환, 감염 후유증 등을 앓아왔으며, 공식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평온한 마지막이었다는 것이 가족의 설명이다.
그는 지난 7월 5일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Back to the Beginning’ 콘서트에서 마지막 무대를 가졌다. 블랙 사바스 원년 멤버들과 함께한 이 공연은 그의 마지막 공식 무대로 기록됐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무대에 오른 그는 관객들과 눈을 맞추며 노래했고, 팬들은 뜨거운 박수로 그의 투혼에 화답했다.
1948년 12월 3일 영국 워릭셔주 마스턴 그린에서 태어난 그는 6남매 중 넷째로,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다. 학창 시절에는 난독증과 청각 장애, 학교 폭력 등에 시달리며 정규 교육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청소년기에는 절도 전과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교도소에서 들은 비틀즈의 음악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1968년, 그가 참여한 밴드는 이름을 ‘블랙 사바스’로 바꿨고, 1970년 첫 앨범을 내며 음악계에 충격을 안겼다. 기존 록 음악과는 차원이 다른 어두운 분위기와 둔중한 리프, 초현실적인 가사로 전 세계 음악 팬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Paranoid’, ‘Iron Man’, ‘War Pigs’ 등의 곡은 지금도 메탈 클래식으로 꼽힌다.
그러나 약물과 알코올 중독 문제는 밴드 내 갈등을 불렀고, 결국 1979년 그는 블랙 사바스에서 퇴출됐다.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만난 샤론 아덴은 그의 삶을 되돌려놓았다. 샤론은 그의 매니저이자 동반자로, 이후 오스본의 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듬해 발표한 솔로 데뷔 앨범 ‘Blizzard of Ozz’는 ‘Crazy Train’, ‘Mr. Crowley’ 등을 수록하며 상업적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오지는 솔로로서도 블랙 사바스 시절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메탈 신에서 중심적인 인물로 활약했으며, ‘No More Tears’, ‘Mama, I’m Coming Home’ 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했다. 1996년에는 ‘Ozzfest’라는 록 페스티벌을 직접 기획해 수많은 신진 메탈 밴드들의 등용문을 만들었고, 메탈 대중화에 기여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MTV 리얼리티 프로그램 ‘The Osbournes’를 통해 대중문화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카메라 앞에서 보여준 그의 솔직한 가족사는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으며, 고전적 록 스타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현대적 셀럽’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육아, 부부 갈등, 자녀 문제 등 현실적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논란과 충격, 그리고 복귀의 연속이었다. 공연 중 살아 있는 박쥐를 물어뜯은 사건, 약물로 인한 각종 스캔들, 공연 중 낙상으로 인한 중상 등 숱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는 끝내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투병 중에도 “음악이 내 전부”라는 말을 반복했고, 실제로 생의 끝자락까지 무대에 서려 했다.
음악적으로도 그는 독보적이었다. 블랙 사바스와 솔로 활동 모두에서 록앤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의 앨범은 누적 1억 장 이상 판매되었다. 그래미 수상은 물론, 영국 브릿 어워즈 평생 공로상, 클래식 록 어워즈,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까지 음악계의 거의 모든 상을 거머쥐었다. 오지는 록이라는 장르 안에서 가장 오랜 기간 영향력을 유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말년에 들어서도 후배 아티스트들의 멘토 역할을 자처했고, 젊은 세대와의 협업을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의 래퍼 포스트 말론과의 협업은 세대를 아우르는 감각을 증명했으며,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악계 안에서 스스로를 다시 쓰는 인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랑받았고, ‘괴물 같은 아티스트’에서 ‘따뜻한 할아버지’로의 전환은 자연스러웠다.
마지막 무대가 열린 버밍엄은 그의 고향이자 음악 인생이 시작된 장소였다. 그는 그 무대에서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눈물을 보였고, 수천 명의 관객이 기립 박수로 그의 여정을 기렸다. 이날의 공연은 생의 마지막 인사이자 하나의 역사로 기록됐다.
현재 장례식 일정은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며, 가족은 사적인 추모를 희망하고 있다. 전 세계 팬들과 음악계는 SNS와 방송을 통해 그를 추모하고 있으며, 온라인상에는 그의 음악과 어록, 공연 영상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오지 오스본은 단지 한 명의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는 장르를 창조했고, 그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부침 많았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그는 영원한 ‘록의 전사’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멈췄지만, 그가 남긴 음악과 유산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