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 카페엔 ‘아메리카노’가 없을까 — 커피 강국 일본의 특별한 문화 코드

왜 일본 카페엔 ‘아메리카노’가 없을까 — 커피 강국 일본의 특별한 문화 코드

한국에서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 주문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아메리카노는 가장 기본적인 커피 메뉴이자, ‘카페의 표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일본 여행을 가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는 혼란이 있다.
분명 커피전문점인데, 메뉴판 어디에도 ‘아메리카노(Americano)’가 없다.
대신 ‘블랙커피(ブラックコーヒー)’, ‘드립커피(ブレンドコーヒー)’ 또는 ‘핫커피(ホットコーヒー)’가 적혀 있다.
왜 일본 카페에서는 우리가 익숙한 ‘아메리카노’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을까.


일본의 커피 문화는 ‘에스프레소’가 아닌 ‘드립’에서 시작됐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섞어 농도를 조절한 음료다.
즉, 이탈리아식 커피 추출법에서 파생된 서양형 메뉴다.
반면 일본은 오래전부터 드립(핸드드립) 커피 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일본은 19세기 말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커피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보다는 드립 방식이 주류를 이뤘다.
1950~60년대 ‘키사텐(喫茶店, 전통 다방)’이 대중화되던 시기,
드립으로 한 잔씩 정성스럽게 내리는 커피가 일본식 ‘정중함’과 ‘수공예 정신’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에게 ‘커피’란 곧 ‘드립커피’를 의미했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를 연하게 탄 커피’라는 개념이지만,
일본식 커피는 본래부터 처음부터 연하게 추출된 블랙커피였기 때문에 굳이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대신 “브렌드커피”

일본 카페의 메뉴판을 보면 ‘アメリカーノ(아메리카노)’보다 ‘ブレンドコーヒー(브렌드 커피)’가 훨씬 일반적이다.
‘브렌드커피’란 여러 원두를 섞어 드립 방식으로 내린 커피를 뜻하며, 한국의 아메리카노와 맛이 매우 비슷하다.
즉, 이름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음료인 셈이다.

일본에서는 ‘브렌드커피’가 곧 ‘기본 커피’를 의미한다.
“커피 주세요(コーヒーください)”라고 말하면 대부분 드립커피가 나온다.
에스프레소 기반의 아메리카노는 일부 서양 브랜드 카페(예: 스타벅스, 블루보틀, 세가프레소 등)에서만 존재한다.


아메리카노는 ‘이탈리아식’, 일본은 ‘장인의 커피’

아메리카노가 세계적으로 보급된 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통해서다.
이탈리아에서 주둔한 미군이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 마신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일본은 이 문화가 들어오기 전 이미 자신들만의 커피 문화를 확립했다.
‘핸드드립’은 커피 한 잔을 내릴 때 물줄기 굵기, 시간, 온도까지 계산해내는 장인의 기술이자 미학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에스프레소처럼 빠르고 진한 커피보다는,
천천히 추출된 부드럽고 깔끔한 커피가 더 정통으로 여겨진다.

즉, 아메리카노는 일본에서 ‘굳이 새로 만들 필요가 없는 커피’였던 것이다.
이미 그보다 오래된 ‘드립 블랙커피’가 있었으니까.


일본인은 ‘뜨거운 물을 타는 커피’를 싫어한다

일본인들이 아메리카노에 유독 무심한 이유 중 하나는 맛에 대한 철학적 차이도 있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섞기 때문에 본연의 향이 희석되고 산미가 흐려진다.
하지만 일본의 커피 애호가들은 “커피는 물로 희석하면 맛이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커피는 ‘균형과 집중의 예술’이다.
한 잔을 추출할 때의 향과 맛의 농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진짜 커피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려면 진하게, 드립커피를 마시려면 천천히.
즉, ‘물로 섞는 커피’는 진정한 커피가 아니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


일본인의 커피 소비 패턴 — “아메리카노보다 아이스커피”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 ‘아이스커피(アイスコーヒー)’는 아메리카노보다 훨씬 대중적이라는 것이다.
여름철 일본 카페에서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대신 아이스 드립커피를 주문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일본식 아이스커피는 진하게 내린 드립커피를 얼음 위에 바로 떨어뜨려 식히는 방식으로,
희석되지 않은 진한 향과 깔끔한 쓴맛이 특징이다.
즉, 한국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비슷해 보이지만 맛은 훨씬 진하고 깔끔하다.


일본 프랜차이즈 카페의 경우

스타벅스, 투썸플레이스, 블루보틀 등 글로벌 체인점은 일본에서도 ‘아메리카노’를 메뉴에 포함한다.
하지만 일본 토종 브랜드인 도토루(Doutor), 코메다커피(コメダ珈琲), 사자커피(珈琲館) 등에서는
대부분 ‘아메리카노’ 대신 ‘브렌드커피’ 또는 ‘핸드드립 커피’가 대표 메뉴다.
심지어 일본 스타벅스에서도 아메리카노보다 ‘드립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이 훨씬 많다.
이는 일본 소비자들이 “커피는 바로 추출한 드립이 더 신선하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노’ 없는 나라, 그러나 ‘커피 감성’은 가장 깊은 나라

결국 일본에서 아메리카노가 낯선 이유는 단순히 메뉴 차이가 아니라,
커피를 바라보는 문화적 태도의 차이다.
한국은 ‘합리적이고 간편한 커피’가 중심이라면,
일본은 ‘시간을 들여 정성껏 내린 커피’에 더 가치를 둔다.

그래서 일본 카페에선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 대신
드립포트에서 물이 천천히 떨어지는 ‘소리 없는 정성’이 흐른다.
이들에게 커피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장인정신과 여유를 담은 하나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노가 없는 나라. 하지만 커피의 깊이를 아는 나라.
그것이 바로 일본이다.
한국인이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 주문했을 때 점원이 “브렌드커피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묻는 이유는,
단순한 메뉴 차이가 아니라 커피 철학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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